현대미술 작가 이배 : 고요함을 그리는 남자
이배(Lee Bae, 1956년 경상북도 청도 출생)는 숯을 재료로 한 독창적인 작품 세계로 국내외 현대미술계에서 주목받는 대표적인 한국 작가입니다. 그는 1990년대 초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 정착하며 본격적인 국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미술계가 단색화 이후의 흐름을 모색하던 시기로, 이배는 이와 다른 물질성과 동양 철학의 접점을 추구하는 작업으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그가 숯을 작품 재료로 선택한 것은 단순한 조형적 실험이 아니라, 존재와 시간, 사라짐과 흔적에 대한 깊은 사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숯은 나무가 불에 타면서 변화한 형태로, 소멸의 과정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남는 재료입니다. 이배는 이 숯을 캔버스 위에 붙이고 문지르며, 혹은 벽면과 공간에 설치하며 "시간이 지나도 남겨진 에너지"를 시각화합니다. 그의 작업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요함의 밀도’가 있습니다. 화려한 색채나 감정의 과잉 대신, 이배는 절제된 표현과 반복을 통해 관객이 스스로 감정과 기억을 투영하도록 유도합니다. 이는 동양의 선(禪) 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작가는 이를 통해 관조적 사유의 공간을 창출하고자 합니다. 이배는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수여하는 ‘예술 및 문학 훈장(Chevalier des Arts et des Lettres)’을 수상한 바 있으며, 그의 작품은 루이비통 재단, 퐁피두 센터, 부산시립미술관, 리움 삼성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는 한국 미술의 정체성과 철학을 현대적 언어로 번역하여 국제무대에 소개하는 중요한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삶과 작업은 물질의 본질, 시간의 흐름, 존재의 미묘한 흔적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자 응답입니다. 숯이라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재료를 통해 이배는 한국 현대미술의 경계를 확장시키고 있으며, 그의 작업은 미술계에 ‘침묵의 언어’를 새롭게 정의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Burning’과 ‘Issu de Feu’, 숯의 조형 언어
이배 작가의 예술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시리즈는 단연 ‘Issu de Feu(불에서 탄생한)’ 연작입니다. 이 시리즈는 작가가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몰입한 숯 작업의 결정체로, 숯이라는 재료가 지닌 물질성과 상징성을 극대화한 표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Issu de Feu’는 불에서 비롯되었다는 의미로, 불의 파괴성과 창조성을 동시에 함축하며, 존재의 근원적인 속성과 시간의 흔적을 드러내는 조형 언어로 평가됩니다. 이배는 숯을 단순한 조형 재료가 아닌, 하나의 예술적 언어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는 숯을 직접 구워내고, 정제된 형태로 재가공한 뒤 이를 캔버스 위에 붙이거나 일정한 구조로 배열합니다. 이때 숯의 질감, 균열, 형태는 우연성과 의도성이 결합된 유기적인 미감을 형성하며, 자연의 질서와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전개합니다. 작가는 이를 통해 관람자에게 존재와 소멸, 무(無)의 아름다움을 사유하게 합니다. ‘Burning’ 연작 역시 중요한 대표작입니다. 이 작업에서는 숯을 일정한 패턴으로 배치하거나 캔버스에 반복적으로 문지르며, 불의 흔적을 추상적인 이미지로 환원시킵니다. 특히 ‘Burning’은 "태움의 행위가 곧 그리기이며 조각하기"라는 이배의 철학을 반영합니다. 그는 불이라는 원초적인 에너지를 통해 그림을 그리고, 남겨진 숯의 파편으로 조형합니다. 이 작품들은 회화이자 설치이며, 동시에 수행적 예술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대표작들은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파리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 서울 국제갤러리, 뉴욕의 리처드 투켈만 갤러리 등 세계적인 미술 기관에서 전시된 바 있습니다. 또한 루이비통 파운데이션, 퐁피두 센터, 부산시립미술관, 리움 삼성미술관 등에 영구 소장되어 작가의 예술적 가치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배의 ‘Issu de Feu’와 ‘Burning’은 단순히 흑백의 시각적 대비를 넘어서, 침묵 속의 진동, 시간의 누적, 존재의 흔적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독특한 미학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는 숯이라는 일상적 재료를 현대미술의 중요한 화두로 끌어올렸고, 한국 작가로서 국제무대에서 깊은 예술적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작품세계 – 불과 시간, 존재의 흔적을 담다
이배 작가의 작품세계는 단순한 조형이나 기법적 완성도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의 작업은 불과 숯을 매개로 ‘존재’와 ‘시간’, 그리고 ‘소멸 이후의 흔적’이라는 본질적인 주제를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이배는 예술을 통해 사물의 내면과 그것이 가진 기억, 존재의 무게, 그리고 사라진 이후에도 남겨지는 잔향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숯이라는 재료를 중심으로 강하게 표현되며, 그의 작품을 단순한 시각 예술에서 영적이고 수행적인 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킵니다. 숯은 이배에게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불에 태워 사라진 것의 흔적이자, 동시에 새로 태어난 존재의 증표입니다. 나무가 불에 타고 남은 숯은 물질이 소멸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산물이며, 이는 곧 소멸과 생성이 동시에 일어나는 역설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배는 이 모순적인 시간성과 존재성을 재료를 통해 형상화하고, 재료와 철학이 일치하는 예술 언어를 구축해 나갑니다. 그의 회화는 시끄럽지 않고 조용하지만, 오히려 그 고요함 속에서 강력한 울림을 전달합니다. 반복적인 문지름, 일정한 리듬의 배열, 그리고 절제된 화면 구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내면으로 향하는 사유의 공간을 열게 합니다. 이는 동양의 선(禪) 사상이나 불교적 무상관, 존재의 무상함에 대한 동양적 사유와 맞닿아 있으며, 서양의 미니멀리즘과도 조형적으로 조응합니다. 이배의 작품은 하나의 작업이 아니라 시간의 압축된 흔적이며, 행위와 명상이 결합된 예술적 과정입니다. 그는 손으로 숯을 붙이고, 문지르고, 지우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마치 수행자처럼 작업에 임하며, 그 흔적은 화면 위에 물질로 고스란히 남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한 시각 예술을 넘어, 관객으로 하여금 시간과 존재에 대한 체험을 하도록 만듭니다. 특히 그의 설치작업은 숯덩이 자체를 공간 속에 배치하거나 벽면에 드로잉처럼 펼쳐 보이며, 공간 전체를 하나의 명상적 장소로 전환시킵니다. 이처럼 이배는 재료, 행위, 공간을 통합하며 동시대 미술에서 보기 드문 깊이와 사유의 밀도를 선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예술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며, 사유하는 경험입니다. 이배의 작품은 빠르게 소비되는 시각 이미지가 난무하는 시대 속에서 ‘느린 시간’, ‘깊은 울림’, ‘존재의 정적’이라는 미학적 가치를 되새기게 하며, 한국 현대미술의 정신적 깊이를 세계 무대에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예술 언어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