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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물방울로 철학을 표현한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by buchu 2025.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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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물방울로 철학을 표현한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김창열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이고도 시적인 언어를 구축한 예술가 중 한 명이다. 그가 평생을 걸쳐 반복적으로 그려온 ‘물방울’은 단순한 조형 이미지가 아닌, 존재와 기억, 고통과 치유, 그리고 철학적 성찰이 스며든 깊은 사유의 결과물이었다. 투명한 물방울 하나에 삶 전체를 녹여낸 그는, 단순한 회화의 경계를 넘어선 예술을 실천한 진정한 사유자이자 수행자였다. 이번 글에서는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대표작의 조형적 특징과 작품 세계의 철학적 깊이를 천천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의 물방울이 어떻게 예술이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예술이 우리 내면에 잔잔한 울림을 남기는지를 함께 탐구해 보자.

물방울에 생을 담은 화가 김창열

김창열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났다. 한국 근현대사 가운데 가장 격변의 시기를 살아낸 그는, 분단과 전쟁, 이산과 이주의 삶을 온몸으로 겪으며 성장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지만 6.25 전쟁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해야 했고, 이후 부산으로 피난하여 거기서 그림을 계속 그렸다. 당시의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그림을 놓지 않았고, 1957년 국전 입선을 계기로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작은 무대는 그의 표현 욕구를 담기에는 너무 협소했다. 그는 보다 큰 세계로 나아가기를 원했고, 1960년대 중반 뉴욕을 거쳐 1969년 프랑스로 이주하게 된다. 이후 파리는 그의 제2의 고향이자 창작의 터전이 되었고, 그는 생의 후반을 그곳에서 보냈다. 프랑스에서의 삶은 그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을 안겨주었다. 이국적인 풍경과 문화, 언어적 단절, 고독감은 오히려 그를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게 만들었고, 바로 그 시기에 김창열은 ‘물방울’을 발견하게 된다. 작업 중 우연히 튄 물자국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이를 회화로 재현하고자 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그의 대표 연작 ‘물방울 시리즈’였다. 이후 수십 년간 그는 매일같이 물방울을 그리고, 또 그렸다. 집착에 가까운 반복은 단순한 기교를 넘어 일종의 수행이었다. 그는 물방울을 통해 자아를 비워내고, 그 자리에 기억과 감정을 채워나갔다. 물방울은 그의 고통의 기록이자 삶의 반영이었고, 그렇게 김창열은 ‘물방울 화가’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 퐁피두센터, 뉴욕 현대미술관, 일본 주요 미술관 등에서 전시를 열며 그는 국제적인 작가로 발돋움했고, 2016년 강원도 평창에는 그의 이름을 딴 ‘김창열미술관’이 문을 열며 그의 예술 정신을 기리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2021년 1월 5일, 향년 9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창작을 멈추지 않았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물방울을 그려냈다.

물방울 시리즈와 회귀의 상징성

김창열의 물방울 시리즈는 그저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초현실적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물방울은 감정과 기억, 그리고 존재의 근원을 되묻는 사유의 도구였다. 그가 그린 물방울은 마치 실제처럼 보일 정도로 정밀하고 생생하지만, 그 안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내포되어 있다. 1972년 파리에서 우연히 시작된 이 시리즈는, 실수로 물이 튄 자국을 보고 그것을 그림으로 남겨보겠다는 발상에서 출발했다. 처음에는 일종의 실험이었지만, 그는 곧 물방울의 형상 안에서 자신이 그토록 탐구하던 주제들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 기억, 상실, 존재의 무게. 물방울은 단순한 형상이 아니라, 그에게 있어 인생의 은유였다. 대표작 《회귀》(1975)는 반복되는 물방울들을 통해 생과 사의 순환, 나아가 존재의 윤회를 표현하고자 했다. 김창열은 인간은 결국 자연으로 회귀한다는 사실을 물방울로 암시했고, 그 투명한 구체들 속에 무의식과 영혼, 감정이 녹아 있다고 보았다.《기억의 잔상》(1993), 《명상》(2001)과 같은 작품들도 일관되게 ‘되돌아보기’와 ‘내면 들여다보기’를 주제로 한다. 그의 물방울은 고요한 정적 속에서도 무수한 감정을 품고 있으며, 관람자는 그 앞에 서서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잊고 있던 장면들, 잃어버린 감정들, 그리고 말로 표현하지 못한 상처들이 김창열의 물방울 속에서 되살아난다. 이렇듯 그의 작품은 물방울이라는 단일 형상을 통해 다양한 정서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곧 예술의 언어가 얼마나 깊은 사유를 담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존재와 무를 사유한 예술 철학

김창열의 예술 세계는 동양 철학의 영향을 짙게 품고 있다. 그는 유불선(儒佛仙)의 사상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었으며, 특히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정신은 그의 작품 곳곳에 녹아 있다. 물방울은 그 자체로 유한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무한성을 상징한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찰나의 형상이지만, 그 형상은 영원처럼 화면에 고정되어 있다. 그는 “물방울은 나의 기억과 고통, 망각을 씻어주는 존재”라고 말했다. 물방울을 반복해서 그리는 행위는, 과거의 상처와 기억을 떠올리되 그것을 흘려보내는 일종의 의식이자 수행이었다. 그에게 물방울은 개인적인 상처를 치유하는 동시에,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 도구였다. 김창열은 인간 존재의 덧없음, 무상함, 순환성과 같은 주제를 물방울이라는 형상을 통해 조용히 전달했다. 그의 물방울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 감정의 무게, 삶의 유한함을 사유하게 만든다. 그것은 과장되거나 설명적이지 않고, 마치 한 권의 시집처럼 여운을 남긴다. 특히 21세기 현대미술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흐름 속에서 김창열은 한결같이 자신의 길을 걸었다. 유행을 따르지 않고, 조용히 자기만의 예술 언어를 다듬어간 그의 태도는 오늘날 많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김창열의 삶과 예술은 물방울처럼 조용하지만 깊은 파장을 남겼다. 그는 그림을 통해 기억을 치유하고, 고통을 비워내며, 존재의 의미를 되물었다. 수많은 동시대 작가들이 화려한 기법과 테크놀로지에 기대는 동안, 그는 단 하나의 이미지로 평생을 채워나갔다. 그의 물방울은 단지 시각적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잔잔한 고통과 기쁨, 과거와 현재, 존재와 무, 그 사이의 미묘한 진동을 품은 사유의 결정체이다. 그리고 그 물방울은 지금도 조용히 우리 기억 속에 맺혀 있다. 김창열은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그의 물방울은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존재의 본질을 묻고, 우리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말이다. 그리고 그 물방울을 바라보는 우리는 어느 순간,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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